제12회 미쟝센 단편영화제 심야상영
미쟝센 단편영화제 심야상영에 다녀왔다. 절대악몽1,2,3 섹션을 밤을 새며 즐길 수 있었던 시간.
먼저 내가 관람한 영화중 수상작에 대한 전문가 리뷰가 공식홈페이지에 올라와 있길래 가져와봤다.
<달이 기울면> 정소영
정소영 감독의 <달이 기울면>은 전통적인 내러티브 구조에 포섭되지 않는 서술 방식이 매력적인 영화다. 눈에 띄는 사건이 등장하기보다 극 중 인물의 추상적인 형태의 마음 속 풍경을 끄집어내어 배경으로 구체화하는 쪽에 가깝기 때문이다. ‘제아’(올해 칸영화제 단편 경쟁부문 황금종려상 수상작 <세이프>에 출연했던 이민지가 맡았다.)는 유령 같은 동네에 홀로 남아 오빠를 기다리며 부모님의 제사를 준비 중에 있다. 마음이 심란하던 차인데 지반침하가 심하다보니 집안까지 기울어져 분위기가 영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게다가 라디오에서는 방사능 비 예보에, 혼자 사는 여대생의 성폭행 사건까지 들려오니 제아의 불안감은 극에 달한다. 그때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창밖에서 서성인다.
제아를 괴롭히는 건 사실 외부환경이 아니다. 오히려 변화하는 그녀의 감정에 따라 외부환경도 이에 영향을 받는 쪽이다. 집이 기울었다는 설정이 바로 이를 반영하는데 지금 제아의 마음은 한 곳으로 치우쳐져 있다. 자신을 홀로 두고 집밖을 나도는 오빠에 대한 불만으로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어느 한 곳으로 기운다는 것은 또 다른 한 쪽이 존재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래서 영화는 제아가 품고 있는 불만과 다르게 그녀가 오빠에 대해 잊은 죄책감을 상기시키는 쪽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며 중심을 잡으려고 한다.
<달이 기울면>처럼 의식을 내러티브의 재료 삼은 영화는 오래전부터 있어왔지만 장르화해 보여주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장르는 무엇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제아의 불안한 심리를 따라가고 있다는 점에서 공포로 분류되지만 특정장르로만 기울지 않는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SF적인 분위기를 내기도, 미스터리한 이야기 방식을 취하기도, 현실에 비판적인 시선을 보내기도 하는 등 방사형으로 장르를 뻗어가며 다양한 면모로 무장한다.
사람의 심리란 게 그렇다. 마음을 다잡지 못하면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 정도로 감정은 천변만화하는 법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힘을 발휘하는 지점은 제아의 감정에 따른 장르의 변화와 이를 집이라는 미장센으로 옮겨놓는 연출에 있다. 독창적인 화용론으로 무장한 <달이 기울면>은 주류영화에서는 좀 체 목격할 수 없는 새로운 영화보기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이다.
허남웅 (영화칼럼니스트)
박찬욱 감독 특별상을 수상한 정소영 감독의 <달이 기울면>. 사실 영화를 보고 난 뒤 감독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한 마디로 정리가 안돼 셋이서 머리 맞대고 한참 생각했다. 무너져가는 집, 무너져가는 제아. 연출이 개중 단연 돋보이는 영화였다. 기술적으로도 훌륭했고, 미쟝센도 돋보였다. 그럼에도 감상적인 느낌만이 다가왔었는데 이제 보니 익숙치 않은 내러티브 방식이었기 때문이었던 듯 하다. 리뷰를 읽으니 그때는 채 느끼지 못했던 제아의 '죄책감'이 밀려온다.
<주희> 허정
‘주희’는 여중생 이름이다. 그녀에게는 간절히 바라는 게 있다. 같은 반 친구 ‘민지’처럼 되는 거다. 재개발 지역에서 병든 할아버지, 어린 동생과 힘겹게 살아가는 주희에게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그럴싸한 아파트에서 생활하는 민지는 그야말로 선망의 대상이다. 급기야 '무엇이든 간절히 바라면 이뤄진다'는 말을 주문처럼 외우는 주희는 친구들과 함께 일본 TV프로그램에 나오는 주술적 의식을 따라 하기에 이른다.
허정 감독은 여중생들 사이에서 흔하게 목격할 수 있는 선망과 질투의 양가적 감정을 '분신사바' 유의 주술적 유행과 연결해 이야기를 꾸몄다. 그래서 <주희>는 여중생 영화로 보이지만 극 중 주희가 품은 욕망이 한국 사회 전체의 욕망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다만 모두가 하나의 목적을 향해 덤벼들 때 생기는 부작용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공포물의 형태를 띄는 것이다.
실제로 주희의 욕망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민지를 선망함과 동시에 공격적인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는 데 있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 갖지 못한다는 것은 불편함이 아니라 박탈감으로 변질되었는데 그런 죄의식이 가진 자들에 대한 복수의 형태로 드러나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그런 일그러진 감정이 기성세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 세대에 걸쳐 폭넓게 퍼져있다는 것. 이 영화는 여중생에 포커스를 맞추지만 주희는 그 자신뿐만 아니라 이제 갓 초등생으로 보이는 동생에게까지 주술적 의식에 참여시키기를 꺼리지 않는다.
어쩌다 우리 사회가 이 지경에까지 오게 된 걸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주희>가 주목하는 배경은 멀쩡한 곳도 허물어 그 위에 새로운 건물을 건설하는 한국 특유의 재개발 마인드다. 허정 감독은 영화의 말미에 주희가 살던 폐허를 비춘 후 곧 이은 장면에서 초고층빌딩이 즐비한 첨단 지구를 인서트한다. 그리고 그 위로 흐르는 주희의 내레이션. "변할 수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어" 한국 곳곳을 집어삼킨 재개발 광풍은 주희 같은 여중생마저도 욕망의 노예로 몰락시켰다.
허남웅 (영화칼럼니스트)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주희>. 장르적으로 볼 때 절대악몽부문 영화들 중 가장 '절대악몽'에 부합하는 영화였다. 다른 뜻은 없고 제일 무서웠단 뜻. 어린 주인공의 무섭도록 뒤틀린 욕망에 문득 문득 소름이 돋았다. 영화상에서 끊임없이 대립의 상징물들을 드러내는 방식도 좋았다. 그러한 표현들이 주희의 욕망에 관객이 동감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해 못할 공포보다 이해가는 공포가 더 무서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든 작품.
<그레코로만> 신현탁
아파트 단지 공원에서 동화책을 읽고 있는 한 소년. 노쇠한 경비원 앞에서 소년은 쓰러지고, 아이들은 빙 둘러 이 모습을 지켜본다. ‘간질’이라는 소년의 엄마 얘기에도 아이들은 경비원을 ‘변태 아저씨’라고 말하며 손가락질 한다.
아이들에게 흉측한 괴물 취급을 받는 남원은 아이들의 동화책을 읽으며 잊혀졌던 자신의 젊은 시절과 꿈을 되새겨본다. 과연 그의 꿈은 실현될까?!
동화 속 현실, 현실 속 동화 같은 이야기가 매력적인 작품이다. 작품의 초반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그레코로만’이란 제목도, 꿈인지, 현실인지 아니면 남원이 꿈꾸는 동화 속 이야긴지 모르게 극이 진행되며 점차 설득력이 살아난다. 표정만 가지고 극을 이끌어가는 최주봉의 연기는 압권이며, 그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설명되는 액자 이야기는 나레이션으로 동화책을 읽어주듯 관객에게 다가온다. ‘나비의 꿈’을 꾼 장자의 이야기처럼 남원의 현실은 경비원인지 아님 그레코로만을 꿈꾸는 청년인지, 어느 곳이 꿈이고 현실인지 모호해진다. 그것은 관객 모두가 영화 속으로 흠뻑 빨려 들어가 버렸기 때문 아닐까?!
동성애, 아동성추행 등 요즘 사회의 화두가 되는 이야기를 꿈과 현실 속 모호한 판타지로 엮은 품새가 탁월한 작품이다. 동네 아이들에게 ‘외계인’으로 불리는 나나 여러분들도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변태아저씨나 마귀할멈 같은) ‘괴물’에서 (백마 탄) ‘왕자님’ 또는 ‘공주님’으로 탈바꿈 될 수 있을지 한번쯤 꿈꿔보고 싶지 않을까?!
정지욱 (영화평론가)
절대악몽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한 <그레코로만>. 사실 이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 안했는데. 수상이 가장 의외인 작품이었다. 이야기의 주축이 되는 동화의 흐름이 작위적이었고, 소재의 자극성도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말그대로 동화적인 이야기와 영상미, 그 외엔 느껴지는 게 크지 않았는데. 물론 최주봉 선생님의 연기는 일품. 이건 내 보는 눈은 문제인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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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감상. 내가 이렇게 보는 눈이 없다. 절대악몽 부문에선 <주희>가 상을 받으리라 생각했고 그 이외엔 수상에 와닿는 작품이 없었다. (김치컬트를 제외하고. 사족을 붙이자면, 근래 본 B급 영화 중 가장 B급 다운 영화였다. 우리끼리 이른바 말하는 타고난 병신미를 조태희 감독은 부럽게도 가지고 태어났다며 무지막지하게 부러워했다. 이런 더러운 취향) 세 영화의 공통점은 나머지 영화들 보다 더 '사람'에 초점이 맞춰진 영화라는 점에 있는 듯 하다. 제아의 내면과 주희의 욕망, 남원의 꿈까지. 인간이 돋보이는 영화들. 무튼, 영화보는 눈 좀 길러야겠다.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봐야지.